독서 · 17
  1. 2026
  2. 『실패를 통과하는 일』2026.01.16
  3. 2025
  4. 『싯다르타』2025.10.26
  5. 『학문의 즐거움』2025.10.20
  6.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2025.08.27
  7. 『초신성의 후예』2025.08.14
  8. 『나는 포기를 모른다』2025.08.07
  9. 『심장보다 높이』2025.08.03
  10.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2025.08.02
  11. 『료의 생각 없는 생각』2025.07.14
  12. 『어린 왕자』2025.06.29
  13.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2025.06.24
  14. 『생각 망치』2025.06.23
  15.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25.06.21
  16.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2025.06.10
  17. 『인간의 대지』2025.06.08
  18. 『오즈의 마법사』2025.05.01
  19. 『카할의 과학하는 삶』2025.03.31

『싯다르타』

2025.10.26 · 독서

🖋 헤르만 헤세 / 박진권 옮김 / 미르북컴퍼니 / 2020.06.25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정신, 고매하고 열렬한 사상, 불같은 의지, 높은 소명감을 가장 사랑했다. 그는 싯다르타가 결코 평범한 브라만이나 부패한 제관, 주문을 외어대는 탐욕스러운 장사꾼이나 자만심에 가득 찬 공허한 변설가, 사악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승려가 되지 않을 것이며, 무리 가운데 마냥 순하고 어리석은 양이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몽상과 끊임없는 사념이 강물로부터 흘러나왔고, 밤하늘의 별들로부터 반짝거리며 다가왔고, 햇빛으로부터 녹아내렸다.

그는 존경할 만한 아버지와 여러 스승들, 현명한 브라만들이 이미 그들의 지혜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거의 다 자기에게 알려 주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풍부한 지식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그릇에 다 쏟아부었지만 그 그릇은 채워지지 않았음을, 정신을 만족을 얻지 못했고, 영혼은 안정을 찾지 못했으며,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네 정신이 온 세상이다.

아버지는 경탄할 만한 사람이었고, 거동은 조용하고 기품이 있었고, 생활은 청렴했으며, 말은 지혜로웠고, 두뇌에는 총명하고 고상한 사상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의 등 뒤에서 고요한 열정의 향기가, 몰아적인 헌신의 향기가, 가차 없는자기 부정의 향기가 바람결에 물씬 풍겨 왔다.

언제나 나는 꺠달음에 목말랐고, 언제난 나는 의문이 가득했네, 나는 해마다 브라만들에게 물었고, 해마다 성스러운 베다에게 물었고, 해마다 경건한 사마나들에게 물었네, 오쩌면 오, 고빈다! 내가 코뿔소나 침팬지에게 물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는 배웠을 것이고, 현명해졌을 것이고, 성스러워졌을 것이네.

우리에게 신성해 보이는 모든 것 중에서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무엇이 보존될 것인가? 무엇이 입증될 것인가?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나의 작은 틈새를 통해 단일한 이 세상으로 낯선 것, 새로운 것,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 그리고 제시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는 무엇이 흘러듭니다.

오히려 모든 가르침과 모든 스승을 떠나기 위해서, 그리고 저 혼자만의 목표에 도달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차라리 죽기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판단을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오로지 저를 위해서, 저만을 위해서 판단해야만 하고, 선택해야만 하고, 거절해야만 합니다.

나는 한 인간을 보았다. 내가 눈을 내리뜨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한 인간을 보았다.

붓다는 내게서 무언가를 앗아 갔다. 그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앗아 갔지만, 더 많은 것을 선사했다.

싯다르타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자신을 완전히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기듯이 그는 감정의 바닥까지, 원인이 깃들어 있는 밑 바닥까지 내려갔다. 원인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곧 사고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상에 이 자아만큼 나를 몰두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수수께끼, 내가 하나의 개체이며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되고, 내가 싯다르타라는 이 수수께끼만큼 깊은 고뇌를 안겨 준 것은 없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싯다르타라는 존재가 내게 아주 낯선 미지의 존재라는 것, 그것은 한 가지의 원인, 하나의 유일한 원인에서 유래한다. 나는 나를 두려워했고,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보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세상은 찬란했으며, 세상은 수수께끼 같았다. 여기에 푸른색이, 저기에 노란색이, 또 저기에 초록색이 있었고, 하늘이 흘러갔고, 강이 흘러갔다. 숲이 솟아있고, 산이 솟아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았고, 마술 같았다.

그것은 더 이상 마라의 마술이 아니었고, 더 이상 마야의 베일이 아니였으며, 더 이상 무의미하고 우연한 현상계의 다양성이 아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글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는 그 기호와 철자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착각, 우연 그리고 무가치한 껍질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람은 그것을 읽고, 철자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이라는 책과 내 자신의 본질이라는 책을 읽으려 한 나는 미리부터 추측한 뜻에 맞추기 위해서 기호와 철자들을 무시해 버렸다. 나는 현상계를 착각이라고 불렀고, 나의 눈과 혀를 무가치하고 우연한 현상이라고 불렀다. 아니, 그것은 지나갔다. 이제 나는 깨어났다. 나는 정말로 깨어났고, 오늘에야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꼼짝도 하지 않고 싯다르타는 서 있었다. 한순간, 숨을 한 번 쉬는 순간에 그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자기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깨닫자 한 마리의 새 또는 한 마리의 토끼 같은 작은 짐승처럼 가슴 속 에서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각성 최후의 전율이며,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다.

천태만상이며 형형색색인 그 모든 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구함 없이, 그렇게 단순하게,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관찰하면 세상은 아름다웠다.

이처럼 세상을 걸어가는 것, 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이처럼 각성하고, 이처럼 가까운 것에 마음을 열고, 이처럼 의심하지 않고, 이처럼 세상을 걸어가는 것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일이었다.

낮이 짧았고, 밤이 짧았으며, 매시간이 바다 위에서 돛 아래에 보물과 기쁨을 가득 실은 배처럼 신속하게 지나갔다.

그 모든 것들은 늘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싯다르타는 그런 것에 마음을 두었고,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눈에 빛과 그림자가 스며들었고, 그의 가슴에 별과 달이 스며들었다.

사고와 감각, 이 둘은 멋진 것이다. 배후에는 궁극의 뜻이 숨겨져 있고, 모두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며 유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도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고빈다와 똑같다. 모든이들이 스스로 감사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모두들 겸손하고, 모두들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고, 기꺼이 순종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어린아이 같다.

내게 부족한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나에겐 좋은 옷, 좋은 신, 주머니의 돈이 없을 뿐입니다. 싯다르타는 그런 사소한 것들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계획해서 그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의 목적이 그를 끌어당깁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목적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자기 마음속에 들여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고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면, 누구나 마술을 부릴 수 있고, 누구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며, 생각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영리한 것은 좋은 일이며, 인내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내가 만약 카마스바미였다면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자마자 단단히 화가 나서 서둘러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과 돈이 실제로 낭비됐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좋은 날들을 보냈고, 기쁨을 누렸고, 화를 내고 조급하게 굴어서 내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혹시라도 추후에 수확물을 구매하거나 어떤 목적으로든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간다면,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나를 친절하고 유쾌하게 맞아 줄 것 입니다. 그러면 나느 그 당시에 조급함과 불쾌함을 나타내지 않은 나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별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고정불변의 궤도를 따라 걸으며, 어떤 바람도 그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그들 내면에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법칙과 궤도를 갖고 있습니다.

즐거운 목표 없이 오랜 인생 길을 걷는 데서 생긴 피로감, 시들어 가기 시작하는 기색, 그리고 숨겨진, 아직 말하지 않은, 어쩌면 아직 한번도 의식하지 못한 불안감, 즉 늙음에 대한 두려움, 인생의 가을에 대한 두려움,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그의 길이 얼마나 평탄하고 황량하게 지나갔던가. 수년 동안 싯다르타는 높은 목표도 없이, 갈망도 없이, 비약도 없이 사소한 쾌락에 안주했지만 결코 한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제대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까지, 자살할 생각을 품을 때까지 처절하게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신은 아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때리지 않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부드러움이 단단함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물이 바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사랑이 폭력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어리석은 짓을 못 하게 하려고 과거의 당신은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까?

당신이 아들을 위해서 열 번을 죽는다고 해도, 아들의 운명을 조금도 덜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고빈다로 하여금 이제까지 삶 가운데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 이제까지 삶 가운데 그에게 가치 있고 신성했던 모든 것을 상기시켰다.